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사계절
小寒이 지나간 자리에 피어나는 봄꿈 `소한(小寒) 이지난 5일이었다. 추위의 시작이라는 신호다. 이 추위가 2월4일 입춘(立春) 30일간 이어진다. 小寒은 24절기의 스물세 번째. 음력 12월절ㅡ. 定期法에서 태양의 황경이 285°인 1월5일이다. 恒氣法에서는 冬至로부터 1/24년(약 15.22일)후인 1월6일이다. 이 무렵이 실상은 추위가 매섭다. 한강의 얼어붙은 두꺼운 얼음판에서 썰매타기, 얼음 밑 낚시 놀이의 정서가 유행한다. 또한 이 철이면 예부터 ‘한중 문안’이 오고 갔다. 눈이란ㅡ, 예사 때 원시에서 쫓겨나 자연을 뒤에 두고 모여 사는 큰 도시 사람들에게 잠시 추억의 향수에 잠기게 하는 신의 은총이다. 그래서 서울 사람은 이 계절에 매혹된다. 새해 첫 달부터 뼈저린 추위로 휴지(休止)된 공간에 기적을 살포하는, 감회 깊은 눈보라…, 이 장려한 파노라마의 영상은 겨울의 우상이게 한다. 일진광풍, 그 먹구름을 휘몰아 연 사흘 무대 전환을 시도해 몽환적인 기관(奇觀)을 창조했다. 그러나 미나리 모종이 시작되며. 산꿩이 울고, 깊은 산 옹달샘물이 온기를 일으킨다…. 농가는 小寒 철 날씨에 민감하다. 소한 나흘째가 가을보리 작황의 액일이란다. 비 눈 바람을 걱정한다. 그리고 아흐레째 되는 날, 눈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겨울 폭풍은 눈을 위해 존재하고 거리나 뜨락에 전등이 가설된 조경의 이유는 눈세계의 현란한 조명을 위해서였던가…? 소한의 작품은 서정적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고혹적이면서 퇴폐적인 무희 타이스를 연상케하는 눈의 조화…! 이제 그 무대 위에 마스네의 [타이스]를 연출한다. 저 황홀한 태양은 수도사 아타나엘인가…. 눈의 요녀처럼 세련된 타이스! 태양처럼 맑게 스스로를 비추어온 젊은 이집트의 아타나엘은, 너무 요염하기에 타락하고 있는 타이스를 방관할 수 없었다. 그녀를 수녀원으로 보내지만 젊은 아타나엘은 타이스에 매혹돼 오히려 혼미를 일으킨다... 에메랄드 블루의 깊은 우주에 떠 있는 아타나엘 같은 태양은 지금 타이스의 영혼 같은 소한의 눈 모양에 현혹돼 있는 것을…. 인간생활에 미치는 눈의 혜택, 그리고 그에 대한 찬미는 생략한다. 아니, 눈에 시달리는 삶의 고통은 더욱 멀리하고 싶다. 겨울을 두고 봄을 깨달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눈의 조화가 얼마나 천혜(天惠)인가에 서울 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느낀다. 옛 서화담이 오늘에 산다면, 저 눈빛을 닮은 황진이의 알몸을 그냥 돌려보내지 못한다. 온 하늘이 푸르러 따끈한 햇살이 더욱 겨울눈을 섹시하게 반사하기 때문이다. 골목 언덕을 눈썰매로 왁자하게 무늬 지는 동심의 환희... 이 눈이 녹을 무렵이면, 달동네에 봄이 오는가 싶도록 굳게 닫힌 창을 열고 가는 겨울을 전송할 것이다…. 소한이 미리 꾸민, 눈의 드라마는 애상이요, 소조요, 적료요, 침려요, 정명이란 전말을 엮고 있다. 소한이 지나간 이날에 왜 미리 봄꿈을 소묘(素描)할까? 어동령사춘몽(於冬嶺思春夢)의 명제로ㅡ. 물론 옛 시의 한 구절이다. 그것을 오늘은 더없이 뇌리에 불러일으킨다. 눈이 쌓여 있기에 그렇지, 아늑한 날씨가 봄으로 향해 있다. 왜 이런 날씨가 겨울이어야 되는가? 성급하게 다음 계절을 앞당겨 동경하도록 하는 소한의 속셈은 무엇인가? 겨울이 우리 곁에 50여일 집요하게 마음의 풍류를 깨트리며 몇 번 울부짖게 하리라는 회의를 버리지 못해서다.. 이 50여 일은 언제나처럼 기한(飢寒)의 한식(恨息)을 유전처럼 현대에도 반복한다 굶주림의 추위에 듣는 한 섞인 탄식이다. 노숙자에게 눈은 자유의 부정(浮精)이요, 열락의 탕아요, 불순(不馴)의 기성(奇性)으로 혐오스러울 뿐이다. Prejudice is the child of ignorance! W. 해즐릿의 [소묘와 수필집]에서 보는 `편견은 무지의 자식 이란 명언이다. 겨울의 1월ㅡ. 여기 소한과 함께 하면서 나의 편견은 병적일까? 인습의 습벽 증후군 탓일지 모른다. Think the spring dreams on the winter mountain(於冬嶺思春夢)에서는 기다림의 바람(望)이 일으키는 영양불량 두뇌의 정신력 때문일 것이다. 벌써 봄을 생각하는 madness가 아니고서는…! 하지만 남산을 여울져 돌아오는 소한 바람이 대지에 새 움을 돋게 한다. 저널리즘도 그래서 신춘을 하례하고 있다. 가곡의 밤, 만화페스티벌, 신춘문예당선자 발표 등 산뜻한 `신춘 의 이름으로ㅡ. 소한에 그려보는 봄 꿈ㅡ. 그 조춘(早春)으로부터 출발해 목련꽃에 일렁이는 화려한 교향악. 이 때, S. 게오르게는 [고요한 못 가로 돌아가 보자]고 권유한다. 그리고 G. 바이런에게는 [그대는 울었지]하며 감동을 쏟아낸다. 철 이르게 장미가 필 무렵, R. M. 릴케의 [꿈의 노래]가 울려 퍼지면, G. 미스트랄의 [구름에 부쳐]와 같이 모두의 가슴에 흐뭇한 은혜를 갖게 해달라며 기도한다. 젊은 날의 사랑은 한결같이 프란시스 잼의 [그 소녀]를 그리워한다. 만춘에 이르기까지 봄은 청춘을 높이, 높이 풍선에 띄워 올린다…. 그리하여 E. 베르아렌의 [지금은 좋은 때]는 램프의 등잔 불 따라 온 마음 가득 순식간에 꽃이 피고 기쁨에 동화되게 한다…. 나의 베란다엔 스무 해 넘은 청매(靑梅)의 향기…, 소복차림 고아(古雅)한 눈웃음으로 나를 향해 반긴다. 봄은 짧다. 瞬間의 꿈일 뿐... 기다리는 기회의 꿈 보다 더 순간적이다. `연못의 봄 풀 꿈 깨기 전에, 뜨락의 오동잎에 벌써 가을의 소리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旣秋聲). 추위에 떨며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온화한 대지가 햇볕과 손을 맞잡은 계절, 달빛이 부드러운 냇물과 입 맞춘다고 그것이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무슨 자극이나 충격일 것인가? `그대, 내게 입 맞추어 주지 않는다면! (P. B. 셸리/사랑이란) 그렇게 기다리는 데는 필연적인 프로세스나 행운이 예약돼 있어서다…. 少年樂春 老者惡春ㅡ. 노후생활에 봄꿈은 없는가?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라는데ㅡ. 그들에게는 아름다운 마음의 봄이 있다. 그들이 늙도록 꾸려온 지식은 시장에서 푼푼이 사 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름다운 마음의 봄은 신의 선물이기에 신성하다. Grace is given of God. 마음의 봄을 계절에서 챙기려는 정신의 renaissanceㅡ! 봄은 부와 자유를 상징한다. Springs cover a multitude of woes. 그것은 겨울의 무수한 악몽을 묻어버리기 때문이다. 소한 날의 은은한 봄 빛! 우리의 정신세계를 일깨워주는 삶의 renaissance를 바르게 찾고 맞자는 참 뜻이 거기 듬뿍 함축돼 있다. 견실해야 될 대춘(待春)의 자세ㅡ. 인생의 승부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충만하는 자아의 세계가 거기 있다. 두보(杜甫)의 시 구절이 가슴을 친다. 國破山河在! 곧 나라는 망해도 산하가 있어 사람이 산다ㅡ. 시니컬한 paradox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젊음의 그시절, 그 옛날 그 미비, 미완, 무질서속에서 행복과 희망을 그 안에서 캐냈다. 이제는 완벽한, 그리고 원숙한 질서 안에서 세계를 함께 이끌어갈 시점에 있다. 이제 위대한 renaissance 문화의 실현을 위해 건배하리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농장 생활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이 책은 농장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뉴욕 주 스태츠버그 근교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개, 말, 돼지, 거위, 닭, 소, 염소, 양, 고양이들을 주인공으로 농장의 동물들이 맞고 보내는 사계절의 이모저모를 유머러스한 글과 매력적인 그림으로 담았습니다.저자는 실제로 뉴욕 스태츠버그 근교의 단풍나무 언덕 농장에서 거위와 사슴, 고양이, 양, 오리 등에 둘러싸여 살고 있어요.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장 이야기를 아름답고 오밀조밀하게 그려내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무척 세밀한 그림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아냅니다.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 에 이은 ‘단풍나무 언덕 농장 이야기’ 두 번째 편에 해당합니다.